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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의 쇼펜하우어 비판, NB29:95, Pap. XI1 A 144 본문

철학/인물

키르케고르의 쇼펜하우어 비판, NB29:95, Pap. XI1 A 144

엉클창 2025. 2. 3. 23:08

이 부분에서 키르케고르가 비판하는 쇼펜하우어의 윤리적 관점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제4권 §68에서 전개되는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에서 고통을 통해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금욕(Askese)과 관조(Contemplation), 그리고 궁극적으로 조용한 몰아적 상태(Qvietisme)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쇼펜하우어의 핵심 논리:

1. 삶의 의지를 이해한 자는, 모든 존재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2. 이러한 이해는 개인이 삶의 의지를 부정하고, 금욕과 자발적인 고난을 통해 자기 의지를 죽이는 과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3. 완전한 금욕과 자기 부정은 결국 신비주의적인 해탈 상태(Quietismus)로 이어진다.
4. 이러한 해탈은 인도의 브라만교적 명상과 유사하며, 궁극적으로 신과의 일치를 목표로 한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

1.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실제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다.
그는 철학적으로 금욕을 강조하지만, 정작 본인은 금욕적 삶을 살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사변에 불과하며, 실제 윤리적 삶과는 괴리가 있다.

2.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천재적’ 윤리일 뿐, 보편적 윤리가 아니다.
그는 윤리를 천재(Genius)의 통찰로 제한한다.
그러나 윤리는 특정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 당위(“너는 ~해야 한다”, Du sollst)와 연관되어야 한다.

3. 기독교적 구원과의 차이점
쇼펜하우어의 금욕과 자기 부정은 인도 브라만교적 해탈과 유사하지만, 기독교적 회개와 속죄와는 다르다.
기독교적 금욕은 단순히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다.

 

🔹 결론: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론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실천적 윤리로서는 결함이 많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윤리를 ‘천재의 통찰’로 이해하는 것은, 윤리 자체를 모순적으로 만드는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결국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는 기독교적 신앙과 실천을 통한 구원과 대비되며, 쇼펜하우어가 윤리를 종교적 기반 없이 관조적 금욕으로만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제4권 §66-67에서 다음과 같은 윤리적 입장을 제시합니다.

🔹 쇼펜하우어의 핵심 주장:

1. “모든 사랑(αγάπη [agápē], caritas)은 연민(Mitleid)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명제를 **“역설적인 주장(ein paradoxer Satz)”**이라고 부르며, 모든 선한 행위는 연민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고통이 삶에 필연적으로 내재해 있으며,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은 결핍, 결여, 고통에서 비롯된 욕망일 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을 돕는 모든 행동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며, **타인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연민, 동정심)**이야말로 선한 행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사랑(αγάπη, caritas)은 본질적으로 연민(Mitleid)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선한 행위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를 덜어주려는 동기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연민과 동의어이며, 연민이 없는 사랑은 결국 이기심(Selbstsucht)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3. 쇼펜하우어 vs. 칸트: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윤리학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칸트는 **“진정한 도덕적 행위는 감정(연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성적 숙고와 의무의식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쇼펜하우어는 **“오직 이성적 개념만으로는 진정한 선한 행위를 설명할 수 없으며, 연민만이 참된 도덕적 행동의 원천이다”**라고 주장합니다.

🔹 덴마크어 번역:

쇼펜하우어는 **제4권 §66의 마지막 부분(423쪽)**에서 **“역설적인 명제(ein paradoxer Satz)”**를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모든 사랑(αγάπη [agápē], caritas)은 연민(Mitleid)이다.”

이어서 그는 **§67(424쪽)**에서 이를 더욱 명확히 설명한다.

이제, 앞서 제시한 역설적인 명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삶 전체에 필연적으로 고통이 내재해 있으며, 이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모든 욕망은 결국 결핍, 결여, 고통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욕망이 충족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지, 새로운 긍정적인 행복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의 선함(선행, 사랑, 관용, 자비)이든 그것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일 뿐이다. 즉, 선행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며, 이는 곧 연민(Mitleid)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진정한 사랑(αγάπη, caritas)은 본질적으로 연민(Mitleid)이다.
연민이 없는 사랑은 결국 이기심(Selbstsucht)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칸트의 윤리학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칸트는 “진정한 선행과 미덕은 오직 이성적 숙고에서 나와야 하며, 감정(연민)에서 비롯된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에 대해 **“칸트의 주장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반박하며 “추상적인 개념은 진정한 도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연민(Mitleid)이며, 연민이 없는 사랑은 자기 이익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적 입장: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윤리가 연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1.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선행을 ‘연민의 감정’에만 의존하는데, 이는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 윤리적 의무를 간과한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윤리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개인이 책임을 지는 문제라고 본다.
반면,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신을 배제하고 감정적 동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윤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

2.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결국 금욕주의와 자기 부정으로 귀결되지만, 그는 정작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연민과 금욕을 강조하지만, 본인은 철저히 관조적인 입장만을 유지한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철학적 명제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3. 쇼펜하우어의 윤리는 개인이 ‘너는 ~해야 한다’(Du sollst)라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하는 것을 배제한다.

키르케고르는 윤리가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니라,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 책임을 느끼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 결론:

쇼펜하우어는 윤리의 본질을 연민(Mitleid)으로 보고, 진정한 사랑(αγάπη, caritas)은 곧 연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실제 삶에서 실천되지 않는 철학적 이상론이며, 윤리적 책임을 외면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합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 윤리의 본질이 감정(연민)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당위(책임)에서 비롯되는가?
✔️ 도덕적 행위는 신 앞에서의 책임인가, 인간의 동정심에서 비롯되는가?

이러한 문제는 키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윤리를 가르치는 자가 직접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험하다.

이 부분에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핵심은 철학과 성인의 차이, 즉 철학자는 성인이 될 필요가 없으며, 성인도 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핵심 내용 요약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제4권 §68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모든 인간은 철학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지만, 이를 추상적 개념으로 변환하는 것은 철학자의 역할이다.

철학자의 임무는 추상적 개념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2. 철학자는 성인이 될 필요가 없고, 성인도 철학자가 될 필요가 없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을 세계의 본질을 개념적으로 반영하는 활동으로 정의합니다.

성인의 삶(거룩한 삶)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므로, 철학자가 직접 성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은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철학은 차갑고, 성인의 삶은 뜨겁다.

철학은 개념적으로 정리된 반영(Reflection)이지만, 실제 성인의 삶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제적인 희생과 고난의 과정이다.

따라서 철학자는 ‘의지의 부정’(Willensverneinung, 즉 금욕과 자기부정)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 실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입장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1. 윤리를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윤리를 단순한 철학적 개념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만이라고 봅니다.

진정한 윤리는 삶에서 직접 실천해야 하며, 단순한 개념적 설명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2. 윤리는 ‘천재성’의 문제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천재(Genius)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누구나 실천해야 하는 보편적 의무라고 봅니다.

즉, 윤리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며, **윤리는 개념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Du sollst)’**이라는 것입니다.

3. 철학이 실제 삶을 외면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가 추상적으로 윤리를 설명하면 된다고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입장이 윤리적 무책임이라고 비판합니다.

진정한 윤리는 단순한 ‘사유’가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결론

 

쇼펜하우어는 철학자가 윤리를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보지만,

키르케고르는 윤리를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쇼펜하우어: 철학은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며, 실천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 키르케고르: 윤리는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며,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결국, “철학자가 윤리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윤리(Ethik)를 천재성(Genialität)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윤리를 단순한 도덕적 의무로 보지 않고, 천재적 통찰을 가진 자만이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 핵심 내용 분석

1. 고통받는 자가 진정으로 존경받을 때

쇼펜하우어는 개별적 고통(Leiden)이 아니라, 삶 전체를 고통으로 인식할 때 그 사람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즉, 자신의 고통을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실존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윤리는 천재적 통찰이 필요한 것

그는 고통 속에서 ‘천재적 윤리 의식’(ethische Genialität)이 생겨난다고 주장합니다.

즉, 고통을 겪고, 그것을 통해 전체 삶의 본질을 깨닫는 자가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윤리는 일반적인 도덕적 실천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천재적 깨달음’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3. 결국, 윤리적 삶이란 일반인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

쇼펜하우어는 모든 인간이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천재적인 사람이 고통을 통해 ‘삶은 고통 그 자체’라는 통찰에 도달하고, 그것을 통해 금욕(Askese)과 단념(Resignation)을 실천할 때만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

 

쇼펜하우어의 입장은 윤리를 천재성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천재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보편적 요구라고 보았습니다.

1. 윤리는 모든 인간이 실천해야 하는 것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개념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Du sollst)**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윤리는 천재적인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절대적 요구입니다.

2. 윤리를 천재성에 연결하면 도덕적 무책임이 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통해 윤리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천재적 존재만이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윤리를 특권화하고, 실천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사용될 위험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윤리가 천재성에 의존한다면, 일반인은 윤리를 실천할 필요가 없고, 단지 ‘천재적인 윤리적 인물’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3. 윤리는 고통 속에서 천재적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나타난다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사유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쇼펜하우어처럼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이 윤리적 태도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윤리를 이루는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 결론

 

✔️ 쇼펜하우어: 윤리는 천재적인 사람이 삶의 본질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

✔️ 키르케고르: 윤리는 천재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절대적 요구

 

쇼펜하우어는 윤리를 천재적 통찰의 결과로 본 반면, 키르케고르는 윤리를 보편적 실천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가 윤리를 지나치게 철학적, 지적인 문제로 만들고, 실천적 윤리를 약화시키는 것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칸트(Kant)를 넘어선 철학자로 평가하며, 반성(Reflexion)과 정직(Redlichkeit)의 토대 위에서 철학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칸트 이후의 철학을 **‘가짜 철학(Pseudophilosophie)의 시대’**라고 평가하며,

특히 허풍스러운(intellektualer Anschauung, absoluten Denkens) 철학적 사유 방식을 비판합니다.

🔹 핵심 내용 분석

1. 쇼펜하우어는 스스로를 천재(Genie)로 여겼다

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이 추상적인 개념 놀이(absolute Denkens)를 하면서도,

마치 깊이 있는 철학을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자신은 철학을 반성과 정직이라는 진정한 철학적 태도 속에서 발전시켰다고 주장합니다.

2. 쇼펜하우어는 ‘가짜 철학’과 ‘진정한 철학’을 구분했다

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이 ‘지성적 직관(intellektualer Anschauung)’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사용하며

마치 절대적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반해, 자신은 칸트의 철학을 정직하게 발전시키며 진정한 철학을 추구했다고 주장합니다.

3. 키르케고르의 비판: 윤리를 천재성과 연결하는 것의 위험성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가 윤리를 천재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윤리적 깨달음이 특별한 천재적 인물에게만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절대적 요구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윤리를 하나의 지적인 문제로만 취급하면서,

실천적 윤리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 결론

 

쇼펜하우어: 자신을 칸트 이후 진정한 철학자로 여기며,

가짜 철학과 대비되는 정직한 반성적 철학을 주장함.

 

키르케고르의 비판: 쇼펜하우어가 윤리를 천재적 사유의 문제로 만들면서,

실천적 윤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함.

 

이러한 맥락에서 쇼펜하우어의 **‘나는 칸트 이후 가장 정직한 철학자다’**라는 자기 평가를

키르케고르는 ‘철학적 교만’ 혹은 ‘자기기만’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윤리학, 특히 ‘당위(Sollen)’와 ‘카테고리적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 개념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 핵심 내용 분석

1. 칸트의 ‘당위(Sollen)’ 개념을 조롱하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절대적 당위’(unbedingtes Soll) 개념을

**‘나무로 만든 철(scepter aus hölzernem Eisen)’**이라는

자기모순적 개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즉, 당위(Sollen)라는 개념은 반드시 보상(예: 천국)이나 처벌(예: 지옥)을 전제로 해야 의미가 있는데,

칸트는 이를 부정하고 무조건적 당위를 주장하므로 모순적이다는 것입니다.

2. 칸트의 윤리학은 결국 보상을 전제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윤리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그의 논리는 보상과 처벌을 전제로 해야만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도덕을 따르는 사람이 보상을 받지 못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무조건적 도덕의 당위’라는 개념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라는 겁니다.

3. 윤리는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윤리학이 **‘너는 해야 한다(Du sollst)’**라는 강압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었기에,

진정한 도덕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윤리가 인간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한다고 보며,

**공감(Sympathie, Mitleid)**을 윤리의 핵심 원리로 제시합니다.

4. 키르케고르의 비판: 윤리는 단순한 공감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하면서

윤리를 단순한 **공감(Sympathie)**으로 축소한 것을 문제 삼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윤리를 따르게 된다고 주장했지만,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신 앞에서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윤리는 공감이나 감정적 이해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신앙적 실존’ 속에서 성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결론

 

쇼펜하우어: 윤리는 **공감(Mitleid)**에서 비롯되며,

칸트의 ‘무조건적 당위(Sollen)’ 개념은 자기모순적이라고 비판함.

 

칸트: 도덕은 이성과 보편적 원칙에 근거해야 하며,

보상이나 처벌과 무관하게 따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

 

키르케고르의 비판: 윤리는 단순한 공감이나 감정적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어야 함.

이 논쟁을 보면,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비판하면서 윤리를 ‘공감의 문제’로 축소하고,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공감 윤리가 ‘절대적 윤리’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반박하는 구조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인도 철학(브라만교와 불교)과 비교하며 해석하며, 특히 기독교가 점차 낙관적인(Optimismus) 변형을 거듭하면서 본래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합니다.

🔹 쇼펜하우어의 주장 요약

1. 원죄(Erbsünde)와 구원(Erlösung)이 기독교의 핵심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의지의 긍정(Bejahung des Willens)“과 “의지의 부정(Verneinung des Willens)”**이라고 봅니다.
원죄(Erbsünde)란 삶을 긍정하는 의지이며, 구원이란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는 현대 기독교가 낙관적인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합니다.

2.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브라만교(Brahmanismus)와 불교(Buddhismus)와 유사

그는 기독교의 구원 개념이 브라만교와 불교의 “해탈(Moksha, Nirvana)” 개념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기독교적 구원관이 유대교보다는 인도 철학의 종교적 개념들과 더 가까운 관계가 있다고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유대교는 창세기 1장 31절(Septuaginta)에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παντα ϰαλα λιαν)“라고 말하지만, 브라만교와 불교는 오히려 세계의 고통과 무상성을 강조하며, 구원을 탈출로 본다고 비교합니다.

3. 기독교는 본래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강했으나 변질되었다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초기 형태가 신비주의적인 면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브라만교와 불교의 신비적 사상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기독교가 세속적 변화를 거치면서 그 깊은 철학적 사색을 잃고 낙관적 종교로 변형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특히 무함마드교(이슬람 신비주의)는 밝고 쾌활한 신비주의를, 기독교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신비주의를, 힌두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 종교라고 평가합니다.

4. 기독교는 브라만교,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들이 인도 종교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떻게든 이들 원시 종교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

쇼펜하우어: 기독교의 구원 개념은 브라만교와 불교의 해탈 개념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본래 철학적 깊이가 있었으나, 변질되었다.

키르케고르: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Tilværelsen의 역설)”**이다. 즉, 기독교는 철저하게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해탈(Nirvana)과 같은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기독교를 오해한 것이다.

 

🔹 결론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핵심 개념을 **“의지의 긍정과 부정”**이라는 철학적 구조로 해석하며, 이를 브라만교와 불교의 개념과 연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해석이 기독교의 “절대적 개인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간과했다고 볼 것입니다.

즉, 쇼펜하우어의 해석은 기독교의 개념을 **“비극적 철학 체계”**로 환원하려는 시도이고, 키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단순한 철학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실존적으로 체험되는 것”**임을 강조할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힌두교(특히 브라만교 및 불교)의 금욕적(asketisk) 전통을 비교하면서, 양자의 수행자들이 모두 **“영원성(Ewigkeit)“을 향한 종교적 의무(religieus Pligt)”**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합니다.

🔹 쇼펜하우어의 핵심 주장

1. 기독교의 금욕주의(Askese)

기독교의 발전된 형태에서는 금욕적 요소가 최고조에 이른다.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자(Mystiker)와 성인(Heiligen)**의 가르침에서는 다음과 같은 금욕적 덕목이 강조된다.
완전한 사랑(die reinste Liebe)
완전한 단념(völlige Resignation)
자발적 극빈(Armut)
세속적 사물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Gleichgültigkeit gegen alle weltliche Dinge)
자기 의지의 완전한 소멸(Absterben dem eigenen Willen)
신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Wiedergeburt in Gott)
자기 존재에 대한 완전한 망각(Gänzliches Vergessen der eigenen Person)
신에 대한 몰입(Versenken in die Anschauung Gottes)

2. 힌두교와 불교의 금욕주의

쇼펜하우어는 힌두 윤리에서 기독교와 유사한 엄격한 금욕적 덕목이 강조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힌두교(브라만교)와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보편적 사랑(Liebe des Nächsten)**과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이 핵심 가치로 나타납니다.
쇼펜하우어는 힌두교의 금욕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완전한 비이기심(völliger Verleugnung aller Selbstliebe)
인류를 넘어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는 사랑(die Liebe umfassend alles Lebende)
극단적인 자선 실천(Wohlthätigkeit bis zum Weggeben des täglich sauer Erworbenen)
모든 모욕을 참을 수 있는 무한한 인내(grenzenlose Geduld)
악을 선과 사랑으로 갚음(Vergeltung alles Bösen mit Gutem und Liebe)
모든 육체적 쾌락과 성욕의 포기(Keuschheit und Entsagung aller Wollust)
재산과 가정을 포기하고 고독 속에서 명상하는 삶(Verlassung jedes Wohnorts, tiefe Einsamkeit)
자발적 고행과 극단적 자기 학대(Selbstpeinigung)
자발적인 죽음(금식, 악어에게 자신을 던짐, 히말라야에서 뛰어내림, 산 채로 매장, 신의 수레 아래 몸을 던짐 등)

3. 금욕주의의 본질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금욕적 실천이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존재 의지(Willen)의 완전한 부정을 목표로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와 인도의 금욕주의는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완전한 자기 부정을 통해 해탈(Nirvana, Moksha)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

쇼펜하우어의 입장: 금욕(Askese)은 존재 의지(Willen zum Leben)를 부정하는 과정이며, 이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및 불교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

키르케고르의 입장: 금욕은 단순히 “존재 의지의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적 시스템으로 환원하려고 하지만,
기독교적 실존(Individet)에서는 개인의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핵심이다.
따라서 금욕적 삶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목적이다.

🔹 결론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인도의 금욕주의를 “의지의 부정(Verneinung des Willens)“이라는 동일한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금욕의 본질이 단순한 철학적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와 독립(Tilværelsen의 패러독스)**이라고 강조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쇼펜하우어가 독일 대학 철학 교수들(특히 ‘강단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가 철학 교수들이 철학을 진리 탐구가 아니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그들의 위선이 철학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본 점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쇼펜하우어 자신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1. 쇼펜하우어의 강단 철학 비판

쇼펜하우어는 **대학 철학자들(강단 철학자들, “Kathederphilosophen”)**이 철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단순한 직업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철학적 진실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과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철학으로 돈을 버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철학자가 아니라 소피스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서 등장하는 소피스트들이 철학을 생계 수단으로 삼아 타락했던 모습을 현대 철학 교수들에게 투영합니다.

강단 철학자들은 대중과 정부의 환심을 사려 하며, 체제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변질시킨다고 봅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헤겔 학파를 가차 없이 비판하며,

헤겔의 후계자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이 베를린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과정에서 벌어진 언론과 학계의 대대적인 환영을 조롱합니다.

그는 **“철학 교수들은 철학을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라며,

“그들이 대중과 학계를 속이는 모습이 연극 무대의 코미디보다도 더 가소롭다”고 비꼽니다.

 

2.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비판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의 이 비판이 정확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단순히 신랄한 비판을 내놓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강단 철학자들을 강하게 조롱하지만, 그들과 직접 맞서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고립된 채 살며, 가끔씩 ‘천둥 같은 독설’을 퍼부었을 뿐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결국 그들(강단 철학자들)에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태도”**라고 비판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쇼펜하우어가 진정으로 강단 철학을 무너뜨리고 싶었다면, 베를린 같은 학문 중심지로 직접 가서 논쟁을 벌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했어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신이 코펜하겐에서 이런 전략을 직접 실행했다고 말하며,

철학 교수들의 “무시 전략”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철학적 논쟁을 공적인 장소로 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즉, 쇼펜하우어의 비판이 정확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3. 쇼펜하우어의 자기모순

쇼펜하우어는 대학 철학자들의 위선을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는 철학적 인정과 명성을 갈망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학문적 권위와 철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이 인정받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 트론헤임(Trondheim)의 한 학술 단체에서 그의 논문을 수상하자, 이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를 “그가 그렇게 비판하던 강단 철학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습니다.

 

4. 결론

1. 쇼펜하우어는 강단 철학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이를 실제로 무너뜨릴 행동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2. 키르케고르는 철학적 비판이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공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본다.

그는 쇼펜하우어가 **“고립된 채 독설을 내뱉는 것”**에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3. 쇼펜하우어는 강단 철학자들을 경멸했지만, 정작 그는 학문적 인정과 명성을 원했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인 인물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통찰력은 뛰어났지만, 그의 실천력은 부족했다.

진정한 철학적 혁신을 원한다면,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