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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HH:2, HH:3 본문
HH:2, Pap. III A 211, 2277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1]
이것이 사변적[1]인 그리스도 인식론에 대한 나의 입장이 될 것이다.(새롭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어떤 것이란 점에서만이 아니라 낡고 구식인 것과 대조적으로 새로워지고 활력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도 새롭다.)
이 관점은 동시에 논쟁적이고 아이러니하다.
또한 기독교가 특정한 대상이나 특정한 정상적인 성향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낡은 옷에 새로운 헝겊을 대는 아니라,[2] 회춘의 묘약과 같다.[3]
이에 비해 기독교와 과거와의 관계가 이전에 정의 된 관점은 다음과 같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4]
이 관점은 현상에 부정적으로 관련이 있다. 삶을 파괴하는 추상적인 단조로움을 심어준다. 현대 철학의 표어인 매개라는 개념은 기독교 관점과 정반대이다.[5]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 이전의 단독자의 실존(존재)이 결코 고통 없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슬픔 속에서 화해되는 것처럼, 이전의 실존은 그리 쉽게 소화되지 않고 그 안과 그 위에 무겁게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두 가지 공리적 사고가 똑같이 필요하다. 즉, 기독교는 어떤 인간의 마음에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에 주어졌으므로 그에게 당연하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창조하고 계시다.
Pap. III A 212
여백에서; 포르테스 포르투나(fortes fortuna)[6]는 이방인의 입장이다.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서 강하다는 것이 기독교적인 것이다.[7] 전자는 직접성의 범주임을 즉시 안다. 이 경우의 행복이란, 주어진 직접성의 반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천재성은 직접적인 것이다. harmonia præstabilita[8]: 두 번째는 반성의 범주이며, 개인의 파멸을 통해 도달한다.
HH:3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다고 말할 때, 이것은 특히 모든 인류학적 관점에 적용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신성한 형이상학, 삼위 일체)은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없으므로,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순전히 인간의 관점과 관련하여 계시 개념의 타당성을 훌륭하게 볼 수 있다.[9] 두 가지의 전제를 구분해야 한다. 미학적 관점인 “모든 것이 새롭다”와 교리적이고, 세계사적이고, 사변적 관점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다”를 구분해야 한다.[10]
[1] 고린도후서 5:17
[2] [마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3]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마녀의 부엌 장면에서 파우스트가 마가레테를 만나기 직전에 받은 마법의 묘약이 젊음의 활력을 준다는 것을 암시한다.
[4] [전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5] 다음을 참고하라. Mynster's trea- tise "Rationalisme. Supranaturalisme" in Tidsskrift for Litteratur og Kritik, vol. 1, pp. 249-268, esp. pp. 261. “만일 절대적으로 죄가 없으시고 거룩하시고 복되신 그리스도가 사물의 자연적 과정에 따라, 인류의 자연적 발달 과정에 따라 나타날 수 있었다면,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여전히 원래의 모습, 즉 신격의 순수한 발산 또는 현현이다.…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며,…그리고 첫 번째 창조가 기존의 어떤 계열의 일부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자연적 연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물론 신성한 본성과의 연속성은 분명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창조는 비록 신성한 섭리에 의해 준비되었지만 새로운 계열의 첫 단계이며, 인간에게 신성한 생명을 매개하지 않은 새로운 주입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마르텐센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물의 자연적 과정에 따라 나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시리즈의 첫 번째 단계, 즉 인간에게 신성한 생명이 매개되지 않은 새로운 주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산물이 아니며, 그의 역사에의 진입은 물론 인류에 의해 매개되기는 하지만 인류의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463쪽)
[6] “Fortes fortuna adiuvat”(라틴어 의미, “행운은 용감한 자를 선호한다.”)은 Phormio[Formio], act 2, scene 2(v. 203)에서 나온 인용문이다. 다음을 참고하라. P. Terentii Afri Comoediae sex[Six Comedies by P. Terentius Afer], ed. M. B. F. Schmieder and F. Schmieder, 2nd ed. (Halle, 1819 [1794]; ASKB 1291), p. 425.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Publius Terentius Afer, Andria, Selvplageren og Formio, tre latinske Lystspil[Andria, the Self-Tormentor, and Phormio: Three Latin Comedies], trans. Mathias Rathje(Copenhagen, 1797; ASKB 1295), pt. 2, p. 124,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도전하는 자가 승리한다.”
[7] 이 부분은 다음을 암시한다. 고린도후서 12:9, 고린도후서 13:4
[8] 독일의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만든 철학 용어로, 그는 “Des Versuchs Von der Güte Gottes, von der Freyheit des Menschen, und vom Ursprunge des Bösen”[Essays on the Goodness of God, the Freedom of Human Beings, and the Origin of Evil] in Theodicee[Theodicy](Amsterdam, 1710) 의 첫 부분 59조에서 ‘선조화 교리(preestablished harmony)’를 제안했다.
또한, 다음을 보라. Theodicee, ed. J. C. Gottscheden, 5 ed. (Hannover and Leipzig, 1763; ASKB 619), pp. 212-215. Leibniz employs the expression "l'Harmonie pr釪tablie" in § 80 in La monadologie [Monadology] (written in 1714, published posthu- mously); see God. Guil. Leibnitii Opera philosophica, quae exstant [Extant Philosophical Works of Gott- fried Wilhelm Leibniz], ed. J. E. Erdmann, 2 vols. (Berlin, 1839-1840; ASKB 620), vol. 2, p. 711.
[9] Mynster의 논문 “Rationalisme. Supranaturalisme”, vol. 1, pp. 249-268를 참고하라. 여기에서 그는 신적 계시의 현실성과 타당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266쪽을 보라. 여기서 그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초자연적으로 제정한 의사소통으로서의 계시의 필요성과 현실성을 거부”한다고 비판하고 “정확히 그러한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초자연주의를 옹호한다.
[10] 이 부분은 뮌스터의 C. H. Weiße의 비판을 보라.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행위만큼이나 인간의 행위이며, 인류의 세계사적 발전 과정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다른 모든 두드러진 사건의 연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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