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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3:133, Pap. X4 A137, 기독교 세계(Christendom) - 터툴리안(Tertullian)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23:133, Pap. X4 A137, 기독교 세계(Christendom) - 터툴리안(Tertullian)

엉클창 2025. 2. 6. 03:55

 

NB23:133, Pap. X4 A137

기독교 세계(Christendom) - 터툴리안(Tertullian)[i]

 

나는 여러 번 강조했듯이, 기독교(Χstd.)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 첫째, 인간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완화된 적응(accommodation),[ii] 인간의 필요에 맞춘 형태

✔ 둘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진정한 기독교(den sande Χstd.),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앙

 

나는 또한 말했다. 내가 감히 기독교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제시할 수 없다면, 차라리 양보하여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옳다.[iii]

 

터툴리안(Tertullian)의 기독교 이해
기독교를 가장 강력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제시한 교부(Kirkefader)는 아마도 터툴리안일 것이다.

✔ 그의 기독교 이해는 단순한 도덕(moral)이나 신앙 교리(troes-sætninger)의 집합이 아니다.
✔ 그는 기독교를 “하나님과 세상(Gud - og Verden) 사이의 문제”로 보았다.
➡ 따라서, 터툴리안은 기독교와 세상의 가장 분명한 대립을 우상 숭배(idolatri)에서 찾았다.

 

기독교의 승리 이후, 새로운 도전
기독교가 오랫동안 "승리"했다고 여겨지고, 하나의 문화 형성(culture-formation)까지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Χstd.)와 세상(Verden)은 완전히 얽혀버렸다.

 ➡ 이제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 기독교는 “하나님의 것(Guds)인가, 인간의 것(Mskets)인가?

 

초기 기독교의 열정과 나의 역할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은 실제로 느꼈다.

✔ 그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몇 가지 교리(læresætninger)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되실 것인가?(om Gud skal være Gud)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이 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나의 역할: 기독교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는 것[iv]

✔ 나는 단지 "주의를 환기시키는 사람"일 뿐이다.
✔ 나는 기독교를 하나님 중심으로 회복할 용기를 감히 내지는 못한다.
✔ 그러나 나는 "하나의 외침(Anskrig)"으로 남는다.

나는 기독교가 단순한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본질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자 한다.



[ii] Accommodation은 ‘적응’ 또는 ‘완화’를 의미하며, 특히 종교적 진술, 교리, 또는 개념이 사람들의 이해력(fatteevne), 의견(meninger), 관습(sæder), 그리고 문화적 전통(skikke)에 맞게 조정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Ÿ 종교적 가르침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완화하는 것

Ÿ 특정한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맞춰 교리를 부드럽게 조정하는 것

키르케고르의 문맥에서 Accommodation은 기독교(Χstd.)가 인간 중심적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 기독교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완화하고, 인간의 필요와 이해에 맞춰 편리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것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iii] gøre Indrømmelse”는 “양보하다”, “인정하다”라는 뜻이며, 특히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거나, 상대방의 주장이나 현실을 수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기독교의 실천(Indøvelse i Christendom)』의 「편집자의 서문(Udgiverens Forord)(208,7)과 관련된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를 온전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제시할 수 없다면, 차라리 양보하여 그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한다. , 키르케고르는 “타협된 기독교”를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기독교를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자리를 내놓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