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죽음에 이르는 병
- 계시
- 계시현상학
- 절망
- 도예베르트
- 영원한 행복
- 카리스 아카데미
- 칼 바르트
- 반토대주의
- 헤겔
- 카리스아카데미
- 콩깍지가씐사랑 #카리스아카데미 #복수 #사랑 #허다한죄
- 키르케고르
- 말씀은 거울이다
-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 변증학
- 반틸
- 말씀의 거울
- 토대주의
- 현상학
- 믿음
- 미학
- 능력의 말씀
- 말씀
- 라이프니츠
- 후기 토대주의
- 문화 개신교
- 내면의 감금
- 시인의 실존
- 자유주의
- Today
- Total
프라우스
NB23:144, Pap. X4 A148그리스도(Christus)―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문제점 본문
NB23:144, Pap. X4 A148그리스도(Christus)―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문제점
엉클창 2025. 2. 6. 10:03NB23:144, Pap. X4 A148
그리스도(Christus)―본보기(Forbilledet)로서의 문제점
한 인간적인 상대성(Relativitæt)을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한 실존적 윤리학자(existentiel Ethiker)를 떠올려 보자. 그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그를 한편으로 밀어내고,
단순한 ‘경이로운 존재’(Beundring)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를 본받아야 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즉, 그를 미학적으로(æsthetisk) ‘특별한 존재’로 만든 후,
감탄만 할 뿐, 그를 윤리적으로(ethisk) 따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가 언제나 그리스도(Χstus)에 대해 취해온 태도와 같다.
기독교(Χstd.)는 실존적으로(Existentielle) 매우 빠르게 약화되었다. 이미 3세기경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요구(Fordringen)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즉,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위험을 피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희생을 할 수도 있었다.
이로 인해, 겉으로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수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신앙의 강도(Intensitet)는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위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는 군중이 증거하게 된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밀어내는 전략(Taktik)’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4세기에는, 사람들은 ‘경배(Worship)’와 ‘숭배(Adoration)’라는 명목으로 신-인(神-人, Gud-Msk)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아!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음(Efterfølgelse)’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는 방향을 잃기 시작했다(Desorienteret). 이제 그리스도교는 잘못된 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전진’이라고 불렸다. 오늘날(19세기)에 와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교가 발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결국 그리스도(Χstus)는
신화(Mythe)가 되고, 정교한 문학적 창작물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과거 사람들이 ‘머리가 8개 달린 뱀’이 실재한다고 믿었지만, 후에 린네(Linnée, 식물학자)가 그것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음을 증명한 것과 같다.[i]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더 많이 숭배’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공허한 존재가 된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가장 강력한 실존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기에는, 그를 숭배할 여유조차 없었다.
윤리적으로(Ethisk), 진정한 숭배(Beundring)는 즉각적으로 행동(Handling)으로 변화해야 한다. 만약 숭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즉, ‘숭배가 숭배로 남아 있게’ 된다면, 그것은 곧 윤리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의미와 해석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Efterfølgelse)’을 피하고, 단순히 그를 숭배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즉,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삶의 본보기’가 아니라, ‘존경하고 감탄할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3세기부터 그리스도교는 점차 제도화되었고, 4세기에는 신학적 연구와 숭배가 강조되면서, ‘그리스도를 실제로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 약화되었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를 향한 지나친 숭배’가 오히려 신앙을 약화시킨다고 경고한다.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숭배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길이다. 진정한 신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Efterfølgelse)에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기독교의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발전일 뿐이다. 진정한 신앙은 ‘숭배’를 넘어, 삶 속에서 실천하는 데 있다.
[i] 📌 키르케고르의 '전설 속 뱀'과 린네(Linné)의 자연학적 반박
“hiin Slange”(그 전설적인 뱀)이라는 표현은 전설 속 존재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키르케고르는 스웨덴의 자연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의 연구를 인용하며, “사람들이 한때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키르케고르가 참조한 린네의 연구:
린네는 그의 저서 《Systema Naturae》(자연의 체계, 1766년 12판, 1권, 1부, p. 358)에서 “문헌에서 언급되는 일부 용(drager)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자신이 함부르크(Hamborg)에서 본 해양 뱀(sea serpent)이 자연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작품이라고 결론 내렸다.
키르케고르의 비유적 의미:
그리스도(Χstus)도 한때는 강력한 존재적 의미를 가졌지만, 사람들이 점점 그를 단순한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결국 ‘전설 속의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경고이다. 마치, 한때 ‘존재한다고 믿었던’ 바다뱀이 린네에 의해 ‘결국 존재한 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점점 신화화(Mythe)되면서, 마침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 키르케고르의 주장과 신학적 자유주의(Theological Liberalism)의 등장 배경
✔ 결론부터 말하면, 키르케고르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던 신학적 자유주의(Liberal Theology)의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특히, 19세기 신학적 자유주의가 강조한 역사비평적 성경 연구, 합리주의적 신앙 이해, 그리고 도덕적·사회적 기독교 개념이 키르케고르의 신랄한 비판과 연결된다.
✔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 신앙이 점점 ‘역사적 연구’나 ‘도덕적 가르침’으로 축소되는 흐름을 경계하며, 신앙의 본질적 의미(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Efterfølgelse)가 사라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1. 19세기 신학적 자유주의의 등장 배경
(1) 계몽주의와 이성 중심 사고의 확산
✔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전통적 종교 권위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다.
✔ 신학에서도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에 대한 회의가 커지면서,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이 ‘기적적 요소’보다 ‘윤리적 가르침’으로 해석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2) 역사비평학(Historical Criticism)의 등장
✔ 독일에서는 **요한 제멜라인(Johann Semler, 1725-1791)**과 같은 학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문서’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신앙을 **‘개인의 종교적 경험’**으로 재정의하며, 교리보다 감정적 체험을 강조했다.
✔ 이후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신앙을 도덕적 실천과 역사적 실재로 해석하며, 신학이 초자연적 요소보다 윤리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결과적으로, 신학적 자유주의는:
✔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 연구와 합리적 사고로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고,
✔ 그리스도교를 ‘초자연적 종교’에서 ‘윤리적·사회적 종교’로 변환하려 했다.
2. 키르케고르의 비판 – “그리스도가 신화화된다(Mythologization of Christ)”
✔ 키르케고르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가져온 이러한 흐름을 강하게 비판했다.
✔ 그가 보기에, 19세기 신학자들은 점점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외면하고 있었다.
✔ 그의 핵심 주장:
1️⃣ “그리스도는 단순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 삶으로 따라야 할 존재(Efterfølgelse)다!”
2️⃣ “기독교는 단순한 교리적, 도덕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결단이다!”
3️⃣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연구와 철학적 담론 속에서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 관련된 키르케고르의 비유:
✔ “3세기 이후 그리스도교는 점점 ‘숭배의 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 “4세기에는 신학적 탐구에 집중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Efterfølgelse)을 잊어버렸다.”
✔ “19세기에는 그리스도가 ‘단순한 신화적 존재’로 해석될 위험에 처했다.”
✔ “결국, 신학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역사적 인물로만 분석한다면,
그리스도는 결국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 이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그리스도를 연구하지만, 따르지는 않는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3. 키르케고르와 신학적 자유주의의 핵심 차이점
구분키르케고르(S. Kierkegaard)신학적 자유주의(Liberal Theology)
그리스도 이해 | ‘본받아야 할 삶의 본보기’(Efterfølgelse) | ‘역사적 인물’ 혹은 ‘도덕적 스승’ |
신앙의 본질 | 실존적 결단(Existential Decision) | 합리적 이해(Rational Understanding) |
기독교 핵심 | 하나님과의 관계, 자기 포기 | 도덕적 원칙, 사회적 윤리 |
신학 연구 목적 | 신앙을 강화하고 실천을 촉구 | 역사적·철학적 분석 |
비판점 | ‘연구만 하는 신학은 신앙을 죽인다’ | ‘신앙은 교리적 확신이 아니라 경험이다’ |
📌 결론: 키르케고르는 왜 신학적 자유주의를 비판했는가?
✔ 키르케고르는 19세기 신학이 ‘이론적 연구’에 치중하면서,
실제로 신앙을 살아내는 실존적 결단(Existential Decision)을 잃어버린다고 보았다.
✔ 신학적 자유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고, 윤리적 교훈으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Efterfølgelse)’이 없다면,
기독교는 공허한 신화(Mythe)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즉, 키르케고르는 ‘연구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사는 기독교’를 강조한 것이다.
✔ “기독교는 도덕적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존적 결단이다!”
✔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받아야 한다!”
✔ “신학이 점점 더 연구 중심이 되면, 결국 신앙은 사라질 것이다!”
📌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현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포기하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한 것이다.
✔ 이것이 바로 그가 신학적 자유주의의 흐름을 경계한 이유이다.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NB23:146, Pap. X4 A150금욕(Askese) (0) | 2025.02.06 |
---|---|
NB23:145, Pap. X4 A149바실리우스(Basilius)의 가르침 - 악을 피하는 세 가지 방식 (0) | 2025.02.06 |
NB23:141, Pap. X4 A145터툴리안(Tertullian) - 기독교인의 전쟁 참여에 대한 입장 (0) | 2025.02.06 |
NB23:140, Pap. X4 A144터툴리안(Tertullian) -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독교적 사랑의 본질 (0) | 2025.02.06 |
NB23:139, Pap. X4 A143터툴리안(Tertullian) - 기도의 변화와 그리스도의 영향 (2) | 2025.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