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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Pap. VIII2 B 37:5 n.d., 1847 비교를 가정에 가져 오자마자 사람에게 얼마나 슬프고 쇠약 해지는 변화가 일어나는지 믿을 수 없다. 비교는 저주받은 손님이다. 아무도 이 손님을 먹이거나 만족시킬 수 없다. 아이들의 음식에서 먹기 때문에 비교는 더 배가 고프다. 비교는 이전에 조용하고 차분한 집에서 시끄러운 거주자이다. 비교는 낮이나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다.
NB7:49, IX A 306, n.d., 1848, JP III 2419 ‘믿음’이 변증법적 범주인 것처럼,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며,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이교도들도 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징이 변증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성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할 때,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런 식으로만 하나님은 사랑받을 수 있다.
Pap. VIII2 B 35:8 n.d., 1847 처음에 방향을 틀 때 돛을 가득 채우는 강력한 바람과 돛을 균일하게 채우며 전속력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꾸준히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JP III 2426 (Pap. X1 A 638) n.d., 1849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의 특성으로 칭찬한다. 사람이 더 많은 희생을 할수록, 사랑의 대상을 더 많이 사랑한다. 그러나 희생은 그 사람에게 자신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이것도 여전히 자기사랑의 한 형태이다.
Pap. VIII2 B 32:13 n.d., 1847 이 계명 또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이 말씀은 너무나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실제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자매와 형제를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항상 가르쳤다. 이런 의미에서, 그대는 실제로 그들을 미해해야 하는지 나는 궁금하다. 오, 이 가증스러운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확실히 그것은 그들에 대한 그대의 사랑이 증오로 간주되는 것을 그대가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JP I 944 (Pap. VIII2 B 34:7) n.d., 1847 그러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우상화하고, 당신을 숭배하고, 애지중지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의무에서 면제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는 사실, 그것이 당신을 면제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정한 사랑은 요구되는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는 사실로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희생이 될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탐닉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희생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인간의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판단할 때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은 자기희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것이 특별한 ..
Pap. VIII2 B 35:4 n.d., 1847 그러나 인생에서 당신의 궁극적이고 최고의 관점이 모든 것을 쉽게 만들려는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쓴 글을 한 단어로 읽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반대의 관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적 규정에 따라 가능한 한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착각을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내는데 지치지 않는다. 사상가로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NB2:165, Pap. VIII1 A 282, 1847년 하지만 내 안에 있는 최고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데, 사람들은 공식 직책을 수락하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한다. 사실 공직을 수락한다는 것은 최고의 성취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식 직책을 맡으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굿나잇! 아니, 공식적인 임명을 받자마자, 자신의 업적은 이런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기독교가 자신의 생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독교에 대해 가르친다. 이것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계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이제 군단이 되었기 때문에 상황을 역전시켰다: 생계가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