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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NB14:105, Pap. X2 A 283 n.d., 1849 성탄절 오늘 구주가 당신에게 나셨으나 그분이 태어나실 때는 밤이었다. 그것은 영원한 은유이다: 밤이어야 한다. 한밤중에 구주가 태어나면 낮이 된다. “오늘”은 하나님이 “오늘”이라고 말씀하실 때와 “올해”에 출판된 책에서처럼 영원한 시간을 나타낸다. ‘오늘’은 대대로, 수백만의 사람 중 모든 개인에게, 반복될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크리스천이 될 때마다, “오늘 구주가 당신에게 나셨다”라는 말이 들린다. [눅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NB14:104, Pap. X2 A 282 n.d., 1849 토마스 아켐피스(4권 6장)는 에스겔 33장 16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그의 죄 중 어느 것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다르게 읽힌다: “그의 죄 중 어느 것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전자의 번역이 옳다면, 호기심이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로 죄의 용서에 대한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NB14:103, Pap. X2 A 281 n.d., 1849 작가로서의 나의 활동을 언급할 때, 침례 요한의 말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소리다.” 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기 위해 나는 항상 뒤로 물러나며 소리, 즉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며, 말하는 것만 남는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후퇴한다. 따라서 나는 소리와 같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항상 듣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마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NB14:101, Pap. X2 A 279 n.d., 1849, JP IV 4457 H.H의 경우에 대하여 [여백에서: H.H의 경우에 대하여] 반성 이후의(그 너머의) 단순성을 어떻게 생각하든, 단순성은 직접성의 단순성과 결코 똑같지 않다. 그것은 항상 존재하지만 윤리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반성적 지식에 의해 정확하게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직접성의 순교자와 반성의 순교자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순교자는 진정으로 공감하는 충돌을 할 수 없다. 반성을 통해 생각을 정리한 사람은 어떤 반성에 대한 집착도 없이 그저 직접적인 사람의 단순한 결단처럼 그 결단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매우 웅장해 보인다. 하지만 의심하고 나서 확실성에 도달한다는 모든 헤겔적인 이야기만큼 쓰레기같은 것이다...
NB12:63, Pap. X1 605, JP 2:1391(1849) 여기에서 기독교 안에 있는 주관성(subjectivity)이 밝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인, 예술가 등은 작품에 자신이 너무 드러나면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안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은 창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표시로서, 종이에 있는 워터마크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육신으로, 창조는 하나님이 그 속에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완성되었다.(JP. 2:1391 [1849])
NB12:103, Pap. X1 A 646, 1849년 ‘단독자’이라는 범주가 사라지면 기독교는 폐지된다. 그러면 개인이 인류를 통해, 추상화를 통해, 제3자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과 관련시키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때 기독교는 eo ipso(그 사실에 의해) 폐지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되신 하나님은 실제 모범이 아니라 유령이 된다. 아아, 이것이 지금 나 자신의 삶을 볼 때이다. 참으로 나는 영의 삶을 위해 그렇게 은혜를 받고, 무엇보다도 영적 고난의 도움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은 사람이 얼마나 보기 드문가? 사실상 모든 동시대 사람들은 나를 돈키호테처럼 싸우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기독교는 정반대라고 확신한다. 오늘날의 크리스텐돔은 실존적으로 그리스도를..
NB12:104, Pap. X1 A 647, 1849년 두 가지 종류의 교육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식 교수법으로, 공허한 지식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인 배우는 자가 질문하는 방식이다. 언젠가 한 대화에서 그룬트비히가 아이에게 질문을 강요하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며, 질문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하는 것은 아이라는 매우 귀중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NB12:63, Pap. X1 605, JP 2:1391(1849) 여기에서 기독교 안에 있는 주관성(subjectivity)이 밝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시인, 예술가 등은 작품에 자신이 너무 드러나면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안에 포함시킬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은 창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표시로서, 종이에 있는 워터마크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육신으로, 창조는 하나님이 그 속에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완성되었다.(JP. 2:1391 [1849])